압구정동 말달리기!

압구정동 말달리기!

1. 말 타고 압구정동 마실 나가기.

성격상 궁금한 것은 절대로 못 참는 쪽이라, 늘 호기심이 발동한 것은 꼭 해보고 만다. 말타고 국토를 대장정 할 수 있을까? 그래서 지난 5년간 고산자 김정호님의 대동여지도에 나온 옛 말 길을 따라 국토를 기마대장정하는 프로젝트를 해왔다.

하지만 늘 궁금한 것이, 우리 승마인들이 이토록 사랑하는 마필이 일반인들에게 왜 외면되고 있는 것일까? 혹시 도시 살이에 바쁜 일반인들은 말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아무리 말이 최고의 웰빙 스포츠라고 주장해도, 사람들이 싫어하면 그만이다.

좋아! 그럼 우리나라에서 가장 번화하고, 젊은 감각들이 모여있다는 압구정동, 그 회색도시의 심장 한 가운데 말이 출현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생각 만으론 안 된다. 그건 내 스타일이 아니다. 직접 해봐야 정확한 결과를 알 수 있지.

2. 욕먹을 각오!

분명히 말들은 복잡한 차들 사이로 빠져나가야 한다. 중간에 말똥도 쌀 것이다. 만약 차량과 부딪치거나 마필과 사람이 넘어지거나 한다면, 일반인들은 물론이고 승마인들도 입을 모아 말할 것이다.

'저 미친 Nom!'

그러나 자신은 있다. 그간 5,000Km이상의 아스팔트 외승을 했고, 지금 압구정동을 달리려는 말들은 이미 기마국토대장을 두 번이나 마친 말들이다. 30여 개의 도시를 통과했고 아스팔트 구보 경험도 충분하다. 2필용 말 차를 댈 압구정동의 야외 식당도 섭외를 했고, 마음속으로 출발선과 동작선도 다 계획을 마쳤다.

만약 이 작업이 실패하면 나 개인이 욕먹을 것이고, 성공하여 시민들의 호응을 받는다면 승마계 전체의 좋은 홍보가 될 것이다.

3. 영원이 철들지 않는 소년.

말 차를 먼저 압구정동으로 보내고 강남구 신사동에서 두 필의 말이 출발했다. 나와 내가 그 동안 지도한 연세대학교의 여학생. 어쩐지 자신이 없어 하기에 신사 파출소 앞부터 평보로 건널목을 건넜다. 지나던 시민들은 "와! 말이다."를 연호하고 눈앞에 펼쳐진 놀라운 광경에 다들 카메라 폰을 꺼내 사진 찍기에 바쁘다. 지도하는 여학생 때문에 마음은 조금 불안하기도 하지만, 표정도 관리해야 한다.

여유로운 미소로 건널목을 건네는데, 지나가던 경찰 차가 멈추어 선다.

"저기 아저씨!"

오십 가까이 되어 보이는 경찰관이 차창을 내리고 역시 경찰 특유의 건조한 음성으로 나를 부른다. 웬일이지? 마음속으로 '도로교통법 58조...' 어쩌구를 기억하려고 하는데, 그 경찰관이 오른손을 차창 밖으로 내며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린다. 그리고 멋진 미소.

나도 같이 미소를 보내며 카우보이 모자에 가볍게 손을 대고 인사를 건넨다. 말없이 주고받는 남자들의 인사. 멋지다. 나는 이런 장면을 몸서리치게 좋아한다. 어쩌면 내 속에는 영원히 철 들지 않는 소년이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브록백 마운틴? 그딴건 엿이나!'

4. 풀 오토매틱 지능형 교통수단 말.

영동대로를 따라 회색의 빌딩 사이로 단축구보로 말을 달린다. 이미 퇴근시간이 된 도로엔 시민과 차들이 빽빽하다. 주차장을 방불케 한다. 그러나 말들은 차 사이로 맑은 말발굽 소리를 내며 달린다. 지능을 가진 말들은 차들과 다르다.

차량 사이의 간격이 좁으면 스스로 멈추어 서고, 신호도 차분하게 기다릴 줄 안다. 부조를 주지 않아도 차량의 움직임에 따라 슬그머니 출발도 하고, 곁눈질로 주변에서 환호성을 지르는 처자들을 지긋이 바라보기도 한다. 풀 오토매틱 지능형 교통수단 말. 고층 빌딩들이 말발굽을 따라 뒤로 한발자국씩 멀어진다.

퇴근길의 진풍경에 사람들은 입을 다물지 못한다. 두 필의 말은 발까지 맞추어 가며 죽어있는 도시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지나던 버스의 탑승객들이 바로 곁에서 위 아래로 흔들리며 같은 속도로 달리는 말을 보고 환호한다. 일단 우리가 시민들에게 즐거움을 주는데는 성공한 것 같다. 이 상황이 압구정동에서도 이어질까?

압구정동에서는 벤츠, B.M.W.도 관심 있게 바라볼 대상이 아닐뿐더러, 유명 연예인이 지나가도 못 본 척 한다는데...


5. 가짜 웰빙은 가라. 승마가 왔다.

씨네 씨티 건너편의 중국음식점 탕룽. 우리 기마단이 생월자 파티를 하기로 약속한 곳이다. 아무래도 주머니가 가벼운 우리 기마단의 학생들은 짬뽕국물에 소주가 제격이지. 예전부터 사장님을 알고 있다. 잠깐 들러 보니 말 차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도심 속에선 말이 차량보다 더 빠른 것이다. 물론 신사동에서 압구정동까지 3블록에서의 이야기다. 곧 말 차가 도착할 것이니 주차할 자리를 좀 봐달라고 부탁하고 입을 벌린 채 선 탕룽사장님을 뒤로하고 압구정동으로 들어섰다.

시네시티 앞 건널목을 건너려고 멈추어 섰을 때, 주변의 젊은이들 역시 "와 말이다!"를 외치며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조짐이 좋다.

건널목을 건너 크라제 버거 앞 골목으로 접어들었을 때, 온통 외제 차량의 홍수로 좁은 골목길이 막혀있다. 주변의 젊은이들이 멈추어 서서 사진을 찍느라고 난리다. 와아. 우리나라 아가씨들 정말 예쁘다. 배우들은 명함을 못 내밀 정도로 늘씬하고 싱싱한 순간을 통과하는 처자들. 이번에는 내가 감탄하고 만다. 그런데 그들이 다가와 사진을 찍어대며 묻는다.

"웬말이에요?"
"이게 무슨 행사예요?"
"영화 찍나요?"
"와앗! 나도 타고 싶다."

"네, 승마 보급을 위한 개인적인 홍보 행사입니다. 다들 가까운 승마장으로 가보세요. 말타기. 웰빙에 최고입니다. 다이어트에도 그렇구요."

일일이 대답을 해주는 사이에 앞길이 열렸다. 뒤에 차들이 막혔지만, 이 시간에 바쁜 일로 압구정동에 온 것도 아닐테고, 이성을 헌팅하거나 뭔가 좋은 구경거리를 찾아 기웃거리는 차량들이라, 난데없이 출현한 말을 바라보기가 즐거울 뿐이다.

6. 와! 말이다.

"자! 한번 뛰어볼까?"

일부러 목청을 높여 "하아!" 라고 소리를 쳐본다. 말이 앞발을 높이 들고 스타트한다. 네온이 빛나는 압구정동의 골목길에 두 필의 말이 달리는 말발굽 소리가 울려 퍼진다. 주변 가게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온다. 한결 같이,

"와 말이다."를 먼저 외치고 핸드폰을 꺼내든다. "이런건 찍어 줘야돼" 라는 소리도 들린다. 이제는 엄청나게 커진 밀크와 K100앞을 지나 그대로 별다방을 통과한다. 우회전해서 압구정로 메인 도로를 달린다. 차들 사이로 엄청나게 거대한 말들이 달리는 모습을 보고 다들 한결같은 반응이다. 어쩌면 그렇게 똑같이 좋아하는지 나는 스스로 감탄하고 만다. '역시 우리는 기마민족이야. 이렇게들 좋아하는데, 이들과 말을 어떻게 다시 이어줄까?' 잠시 달리는 말 위에서 고민한다.

7. 저런 게 진짜 쿨 하게 노는 거지!

빠리바께트 앞에서 우회전을 한다. 압구정 메인도로. 그날이 그날 같이 반복되는 숨가쁜 도시의 일상 속으로 말들이 곧장 뛰어든 것이다. 앞서가던 오픈카에서 여인이 일어나 뒤로 돌아보며 핸드폰으로 우리를 촬영한다. 말을 달리는 중에도 그들이 하는 대화가 들린다.

"야아! 저런 게 진짜 쿨 하게 노는 거지!"

세상의 좋은 차와 좋은 모터사이클이 다 모여든다는 압구정동. 주말이면 전국외제차의 30%가 모여든다는 압구정동. 그 압구정동에서 말들은 어느 교통수단보다도 각광받는 존재였다. 달려 왔던 도로를 돌아, 다시 한번 경쾌한 구보로 달려나간다. 갤러리아 백화점 앞을 지나고 지직스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터번스 빌 앞을 지나, 고센 골목에서 평보로 말을 쉬게 한다. 하드락 카페 앞을 달려갈 때 지배인 인 듯한 젊은이가 말한다.

"여기 말 묶어 놓고 쉬다 가세요. 이쪽이요 이쪽."

마음속으로 '장사 할 줄 아는 친구.' 라고 생각한다. 압구정동 한가운데를 달리는 말. 그 말들이 온통 사람들의 궁금증을 유발해 놓고, 자신의 가게 앞에 말을 묶고 맥주라도 한 병 마신다? 아마 그 홍보효과는 놀라울 것이다. 나는 웃으며 말한다.

"오늘은 좀 바빠. 다음에 올게요."
"꼭 오세요. 꼭이요."

그리고 다시 '탕룽' 으로 돌아와 말을 말 차에 실었다.

8. 두 필의 말, 자본주의의 심장을 쏘다.

"정말 재미있어요. 다음에 또 와요."

함께 말을 달렸던 기마단원은 도저히 흥분이 가라앉지 않는 모양이다. 그녀 역시 연세대의 학생이다. 압구정동의 다른 젊은이들과 다를 바 없다. 단 하나, 경박단소한 트랜드 따위 보다는 보다 우아한 선택을 했다는 것.

일단 말 위에서 느낀 감으로는 대성공이었다. 한마디로 압구정동을 뒤집어 놓은 것이다. 다들 갑작스럽게 출현한 말을 보고 즐거워하고 깊은 관심을 보였다. 고급 외제차도, 유명 배우들도 시큰둥해 하는 젊은이들의 시선을 한번에 끌어 모은 것이다. 겨우 두 필의 말로 자본주의의 심장을 쏘았다.

쿨하게 논다는 것. 압구정동에 모여든 젊음들이 추구하는 단 한가지는 그것이다. 그것이 고급 외제차에 예쁜 여인. 또는 멋진 남성. 나이트클럽. 그리고 바를 전전하며 최신음악을 듣고 술을 마시는 것. 지금까지는 그랬다. 하지만 거대한 말을 타고 도심 한가운데를 홀연히 나타나 말달리는 사람들. 그들이 새로 발견한 것은 그것이다. '바로 저런 게 쿨 하게 노는 거지.'

9. 한번을 놀아도 제대로 놀아라

나는 젊은 우리 단원들과 함께, 놀아도 격렬하게 힘과 공을 들여가며 논다. 일년을 땀흘려 훈련하고, 11박 12일 정도 국토를 말 타고 야영으로 종주하며 논다. 땀을 흘리며 훈련하고, 말과 함께 국토를 돌아보고 우아한 차세대 지도자로 무르익어 가는 것. 그런 게 제대로 노는 거다.

상상할 수 있는가? 한번 노는데 일년을 준비하고 노력한다. 프로젝트를 만들어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논다. 뇌에 상처가 날 정도로 잊혀지지 않는 멋진 추억이 남는 놀이다. 이력서에 당당하게 적을 수 있는 놀이다. 돈으로 쉽게 얻을 수 있는 것. 그런 것은 노는 것도 아니다. 노는 것에도 그만한 노력이 들어가야 즐거운 법이다. 잘 노는 일은 결국 열심히 공부하는 일과도 다르지 않다.

나는 젊은이들에게 "제대로 놀 줄도 모른다. 한번을 놀아도 제대로 놀아라." 라고 호통치는 철없는 중년이다. 나는 압구정동의 젊은이들에게 쿨하게 노는 법 한가지를 소개한 것뿐이다. 확실히 쿨하게 노는 법 한가지 말이다. 게다가 오늘 내가 덤으로 얻은 것은, 시민들이 보여준 일만 개 정도의 활짝 핀 미소다. 바로 내가 몸서리치게 좋아하는 그런 것.

그러고 나서 조금 걱정도 된다. 이제 여기저기서 말을 배우는 젊은이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그들이 동호회라도 만들어 모조리 말을 타고 압구정동으로 달려오면 어쩌지? 그래서 압구정동이 온통 예전의 서부시대 텍사스 같은 분위기로 변해 버리면? 말똥은 다 어쩌구? 200년전 런던의 최대 고민은 마분처리였대는데? 기마경찰이나 보안관도 있어야겠네?

참, 나는 너무 낙천적인 것이 문제다. 그건 그때 가서 다시 생각하면 되지. 어쨌든 조만간 다시 압구정으로 말 타고 마실 나가볼 생각이다. 꼭 오라고 했던 하드락 카페에도 약속을 지켜야 하고, 쿨하게 노는 법에 목이 마른 대한민국의 열혈 젊은이들에게 제대로 쿨하게 노는 방법을 보여줘야 하니까!


자작나무 껍질에 새기는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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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 그나저나 압구정동 길가에서 시트콤과 미스코리아 대회를 한다는 PD라는 사람을 만났다. 요즘엔 예쁜 여인들이 넘쳐나는 시대라, 뭔가 새로운 볼거리가 있어야 한다고 한다. 명함을 주고받았는데 전화가 왔다.

"미스 코리아 승마단을 만들면 지도해 주시겠습니까?"
'미스코리아 승마단? 야아, 이걸 어쩌지? 곤란한데?'

by allbaro | 2006/05/05 11:58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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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말달리기 at 2008/11/23 17:34
참 흥분되고 재미있는 글입니다! 역시 우린 기마민족!

막 빨려드는 느낌이군요.

이건 개인적인 질문인데요, 말을 타고 보통 속도로 밤새워 달린다면,

(중간에 몇 번 사람과 말이 적당한 휴식을 취하고)

전주에서 서울까지(옛시대의 비포장 도로로 달릴 경우) 몇 시간이나 걸릴까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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